노·사·정간의 갈등구도가 하반기로 이어지고 있다. 대개 7∼8월은 임단협 교섭이 마무리 된 상태에서 노·사·정이 법·제도 개선 국면에 대비, 현안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는 `준비기'에 들어가지만 올해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업장이 올 임단협 갱신교섭을 6월 이후로 미룬 데다 상반기 내내 지속돼온 노정 갈등이 국면전환없이 계속되고 있다.
◇`노사'없는 노정갈등=올해 상반기는 노사가 아닌 `노정' 갈등만이 지속됐다는 게 노동 문제 전문가들의 평가다. 정부가 올해 초 강한 정부를 표방하며 2차 구조조정 및 노동법 개 정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나섬에 따라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실제 정부는 지난 연말 합병에 반대하는 국민-주택은행노조 파업 농성장에 경찰병력을 투입하고 노조간부를
대량 구속하는 등 노동분쟁에 대해 `힘에 의한 해결방식'을 예고한 바 있다.
올해 2월17일 회사측의 1750명 정리해고 방침에 반대해 파업농성을 벌였던 대우차 노조원 에 대한 정부의 강제해산 조치는 노정이 첨예하게 대립한 대표적인 사건이다. 집회현장에 화염병이 다시 등장하고 `정권퇴진' 구호가 나온 것은 바로 이 시기다. “정부가 노동 배제 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인 것이 노정갈등의 원인이 됐다”는 게 민주노총 유병홍 정 책실장의 지적이다.
노사정위원회는 이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한국노총 노진귀 정책본부장은 “노사정위는 금융·공기업 구조조정과 관련해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제대로 지켜진 것이 없다”면서 “합의사항 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탓에 노사정위가 노동계의 불신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10일 대우차 노조원에 대한 경찰의 폭력진압이 불거지면서 노정갈등은 새로운 국 면을 맞는 듯 했다. 하지만 노동계가 책임자 처벌, 경찰병력 철수, 협상재개 등을 요구했으나 정부는 일부 책 임자 징계 및 대통령 유감표명 선에서 봉합하려 했다. 이로 인해 노정은 6월12일 연대파업 을 두고 정면대결로 치닫게 됐다.
재계도 이같은 노정간의 갈등구도를 비집고 들어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재계는 공 장을 점거하고 파업이 진행중이던 효성울산공장, 여천 NCC에 경찰병력을 투입해달라고 적 극적으로 주장했다. 하반기 노동법 개정에서 유리한 국면을 차지하기 위한 재계의 조직적인 행보가 시작된 셈이다.
결국 정부는 재계의 요구에 밀려 효성울산공장에 경찰력을 투입하면서 `힘의 의한 해결방 식'으로 다시 회귀했다. 정부는 6.12 연대파업에 대한 책임을 거론, 단병호 위원장 등 지도 부에 대해 검거령을 내리는 등 지난 6월 한달만 해도 69명의 노동자를 구속했다. 노조간부 대량 구속은 노동위원회가 분쟁이 진행중인 사업장에 행정지도 조치를 내려 해당 노조의 불 법파업을 부추킨 것도 한 원인이 됐다.
노동계도 이같은 갈등구도를 해소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민주노총이 6월12일 연대파업 을 벌인 데 이어 한국노총이 24일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열었지만 조직적 위력을 보이지 못 했다.
오히려 가뭄을 이용한 언론의 질타, 대한항공조종사노조 파업에 대한 고임금 논란까지 겹쳐 국민적 고립을 면치 못했다. 특히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 6대 요구를 내걸었 음에도 불구하고 `정권퇴진'이라는 구호에 묻히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노총도 6월24일 총력투쟁 결의대회 이후 대통령 면담에서 노동정책의 문제점을 전면 적으로 제기하고 공론화시키지 못했다는 평이다. 한국노총 지도부가 열세에 놓인 노동계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대통령 면담'을 활용하 지 못한 채 의례적인 만남에 그쳤다는 지적이다.
한 노동문제 전문가는 “정부가 노사분쟁을 줄일 수 있는 사전예방장치를 마련치 못하고 경찰력 투입에 의존한 탓에 노정대립이 극심해 진 것”이라고 전제, “재계는 여전히 과거 의 지배적인 노사관계의 관행에서 경찰력 투입을 재촉했고, 두 노총은 현안에 대해서 `따로 국밥'식으로 대응을 했을 뿐 조직적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평했다.
◇“노동법 개정 국민적 공감대 우선해야”=단병호 위원장 등 민주노총 지도부의 명동성 당 농성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노정이 오는 13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를 전후로 물밑 교섭을 통해 사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현재로선 민주노총 지도부의 장기농성은 불가피해졌다.
민주노총이 요구한 `지도부 검거령 해제와 대통령 면담요구'를 정부가 사실상 거부했고 민주노총의 2차 연대파업도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에 노사정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부가 민주노총 지도부 검거령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에 지도부의 선택이나 대의원대회 의 결의는 대정부 투쟁을 하반기 노동법 개정국면까지 지속한다는 결의가 나올 것”이라는 게 민주노총 관계자의 말이다.
경총 관계자도 “임단협이 늦어지면서 하반기 제도개선 문제와의 시기적 편차가 없어졌 다”면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10만 상경투쟁이 결의될지 여부와 그 파급효과에 주목 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사정위의 법개정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노총의 선택도 주목된다. 정부는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 보호법안 등 노동법 개정을 정부입법보다는 최소한 노사정위 합의를 바탕으 로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일각에선 한국노총이 민주노총을 배제한 채 합의할 경우 감수해야 할 부담이 적지 않은데다, 내년 초 위원장 선거가 있어 `노사정위 합의에 의한 법 개정'은 어려울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국노총 노진귀 본부장은 “한국노총은 노사정위안에서 논의를 지속하되 투쟁을 병행하 는 방식으로 제도개선 투쟁에 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민주노총 유병홍 정책실장은 “국민들은 현재 노동시간단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며 민주노총은 배제된 상태”라며 “이런 상태에선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를 완성하는 방향으 로 법 개정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물론 노사정 관계에 있어 의미있는 실험이 하반기에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올 상반기 에는 철강업계 노사가 간담회를 열어 미국의 철강수입제한 조치에 함께 대응을 모색한 데 이어 극심한 갈등을 경험한 화섬업계 노사도 구조조정을 두고 토론회를 벌일 예정이다. 산 업·업종별 노사가 구조조정 문제를 두고 의
미있는 대화를 모색하고 있는 셈이다.
노동교육원 황기돈 선임연구위원은 “노사정이 상반기 내내 각자의 위치와 실력(힘)을 확 인시키는 데 급급했던 만큼 이제는 불필요한 대결을 해선 안된다”면서 “하반기에는 노동 법 개정이나 구조조정 문제 등에 관한 실질적인 토론의 장을 만들고 국민적 공감대를 확산 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